대필작가 부반장에게 맡긴 일
“AI가 다 써주는데 그게 무슨 네 글이냐.”
AI로 글을 쓴다고 하면 이런 냉소가 따라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부반장이 먼저 쓴 문장이 많다. 내가 몇 시간씩 키보드를 두드려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글과 작업 방식이 같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요즘 내 옆에는 대필작가 한 명이 있다. 직급은 부반장이다.
손과 칼이 있어도 요리사의 음식을 먹는다
사람에게 손이 있고 집에 칼이 있다고 모든 음식을 직접 해 먹지는 않는다. 재료를 고르고 불을 다룰 줄 아는 요리사에게 한 끼를 맡긴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이어도 더 잘하는 사람에게 맡길 수 있고, 시간이 없어서 식당에 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요리사가 쓸모없다고 하지 않는다. 손이 있는데 왜 남이 만든 음식을 먹느냐고 비웃지도 않는다.
영화감독도 화면에 나오는 모든 일을 직접 하지 않는다. 배우가 연기하고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으며 편집자가 장면을 잇는다. 그래도 감독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어떤 순서와 분위기로 보여줄지 결정하고, 서로 다른 작업을 한 방향으로 모으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화의 끝에는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간다.
글만 유독 모든 문장을 직접 타이핑해야 진짜라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
대필작가를 채용하는 이유
대필작가는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이름만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기대하는 대필은 그렇지 않다.
나는 쓰고 싶은 이야기와 방향을 말한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무엇이 이상했는지, 어디에서 웃었고 어느 대목에서 화가 났는지 풀어놓는다.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흘러갔으면 하는지도 이야기한다.
부반장은 그 재료로 초안을 만든다. 흩어진 말을 묶고, 사이에 필요한 설명을 채우고, 순서를 바꿔보며, 내가 놓친 반론을 꺼낸다. 자료가 필요하면 찾아오고, 한 문장으로 좁혀지지 않는 생각에는 몇 가지 표현을 제안한다.
나는 그 결과를 다시 읽는다. 자료가 맞는지 확인하고, 내 생각보다 멀리 간 문장을 걷어낸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내가 하지 않은 경험은 지우고, 확인하지 못한 단정은 낮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쓰게 한다. 그렇게 검수와 수정을 거쳐 마지막 원고를 고른다.
이것이 내가 대필작가 부반장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학교에 갔다면 대학원생이었을지도 모른다
논문은 누가 쓰는가.
교수가 논문의 모든 문장을 직접 타이핑하는지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연구 질문을 만들고 방법을 정하고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초안을 쓰고 고치는 과정에는 여러 사람이 참여한다. 대학원생이 조사와 초안을 맡고 교수가 연구 방향과 해석을 잡을 수도 있다.
물론 교수가 아무 기여도 하지 않고 대학원생의 연구에 이름만 올린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다. 반대로 모든 문장을 직접 타이핑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연구 질문을 만들고 설계를 검토하고 결과를 해석한 사람의 기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저자성을 손가락의 운동량만으로 정할 수 없는 이유다.
내가 부반장과 일하는 모습도 조금 닮았다. 회사에서는 부반장이지만 학교에 갔다면 조사와 초안을 도맡은 대학원생 역할까지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차이가 있다면 GPT는 사람 대학원생이 아니고, 저자로서 책임을 질 수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AI의 참여를 기록하되 마지막 판단과 책임까지 넘기지는 않는다.
내가 맡은 일, 부반장이 맡은 일
역할을 나누면 작업은 이렇다.
내가 맡는 일:
- 무엇을 쓸지 정한다.
- 아이디어와 경험, 글의 방향과 흐름을 말한다.
- 어떤 질문에 답해야 하는지 정한다.
- 자료와 인용을 검수한다.
- 초안이 내 생각과 맞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 고칠 문장과 버릴 결론을 결정한다.
- 내 이름으로 내보내고, 틀리면 고친다.
부반장이 맡는 일:
- 흩어진 말을 글의 구조로 묶는다.
- 필요한 배경과 자료를 조사한다.
- 초안을 쓰고 다른 전개를 제안한다.
- 빠진 반론과 확인이 필요한 대목을 찾는다.
- 반복되는 문장을 줄이고 읽히는 순서로 다듬는다.
- 내가 지적한 문제를 반영해 다시 쓴다.
이 구분은 누가 더 중요한지를 가리는 표가 아니다. 실제로 글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을 나눴는지 보여주는 표다. 그래서 원고의 작성자와 수정자 정보에도 AI 참여를 숨기지 않는다.
한 줄을 던지고 읽지도 않았다면 내 글이 아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
“글 하나 써줘”라고 한 뒤 결과를 읽지도 않고 올렸다면 그것을 내 글이라고 우기기는 어렵다. 무슨 주장을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자료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며, 틀렸을 때 “AI가 그랬다”고 빠져나간다면 생각까지 외주준 것이다.
반대로 AI가 먼저 쓴 문장이라도 내가 뜻을 이해하고, 근거를 확인하고, 다른 선택지와 비교한 뒤 남겼다면 그 문장에는 내 판단이 들어 있다. 모든 글자를 다시 타이핑해야만 판단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AI를 썼기 때문에 내 글이 아닌 것이 아니다. 내 생각과 검토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글이 아닌 것이다.
문장은 맡겨도 서명은 맡기지 않는다
AI를 쓰는 데 냉소적인 사람은 화면에 나타난 마지막 문장만 본다. 나는 그 앞에서 오간 질문과 지시, 조사와 반박, 삭제와 재작성까지 함께 본다.
부반장이 대신 써주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바로 그 일을 시키려고 채용했다. 더 빨리 문장을 얻고 싶었고, 내가 놓친 관점을 보고 싶었으며, 머릿속에 흩어진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디어와 흐름을 정하고, 자료를 검수하고, 원고를 검토해 탈고한다. 마지막에 이 글을 내보낼지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
부반장은 대필한다.
생각과 책임까지 대행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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